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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을 사랑한 선교사, 언더우드
등록일 2023-09-02 조회수 650
오늘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를 간략하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누구보다 조선을 사랑했던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원두우元杜尤, 1859-1916)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존(John Underwood)과 어머니 엘리자벧(Elisabeth Grant Marie)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하여 문학사 학위를 받고 그해 가을 '뉴 브런즈윅' 시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 입학하였다. 그 후 그는 엘린우드 박사의 지원과 맥 윌리암스의 기부(6,000달러)로 1884년 7월 28일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 의하여 한국 최초의 목회 선교사(Clerical Missionary)로 파송되었다.

언더우드는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다음 해 1월 25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였으나, 한국 사회가 갑신정변으로 불안한 상황이었으므로 일본에 우선 정박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헵번(I, C, Hepburn) 박사의 집에 거하면서 선교 사업에 필요한 훈련을 받는 한편, 미국 선원들을 위한 전도 집회를 열었고, 이수정에게서 2개월간 조선 말을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한국으로 부임하였다.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이었다. 언더우드는 아펜젤러와 함께 이수정 번역의 마가복음을 재번역하기 시작했으며,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하고 1886년 3월 29일 설립된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1885년 말부터 고아원 운영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 1886년 2월 14일 미국 공사관을 통해 정부에 설립 허가 신청서를 제출하여 김윤식의 승인을 얻었다. 고아원의 원장은 조선인이었으나 실제 운영은 언더우드가 맡았다. 언더우드는 고아원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것을 장차 대학이나 신학교로 발전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오하이오 주 클리브랜드 시에 거주하는 세브란스(L. H. Severance)씨가 거액을 기부하여 병원도 세웠다.

한편 언더우드는 대학 설립을 구상하여 연희 전문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15년 3월 5일 언더우드를 교장으로 하여 미국 북 장로교, 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등 각 선교부와 연합으로 서울 종로에 있는 기독교청년회 회관에서 60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경신학교 대학부'가 연희 전문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또한 언더우드는 1887년 9월 27일 서울 정동에 있는 자기 집 사랑방에 14명의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시작이었다. 교회 창립에 모인 14명 중 13명은 언더우드가 입국하기 전 만주에서 로스(John Ross)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서상윤 등의 인도로 신자가 된 이들이었다.

한편 일본의 교육령에 의하면 교육에 종사하는 자는 일본어를 익혀야 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는 1916년 1월 초 일본으로 건너가 하루 9시간을 일본어 공부에 매진하였는데, 이런 강행군은 그의 몸을 심히 쇠약하게 하였고, 병이 중하여 그해 3월 조선으로 귀환하였으나 31년 전 조선에 처음 입국했던 같은 달, 그리고 거의 같은 날 인천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
의사의 권고에 따라 9월에 아틀란타시(Atlantic City)의 병원에 입원 1916년 10월 12일 오후 3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조선에서 그렇게도 많은 일을 했던 큰 별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출처: 이광린, 초대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 &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언더우드의 부인),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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